산행지 : 병마산~동림산~만경산~운주산

산행일 : 2014년 9월17일.수요일

누구랑 : 나홀로

어떻게 : 조형아파트~병마산~동림산~만경산~운주산~고산사~미곡리 버스 정류장.

 

     (산행지도 : 실제행로 노란색 실선)

 

 

얼마전...

조치원의 오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내고향 산너울이 내내 눈에 밟힙니다.

가까이 내 고향의 산도 못 가본 넘이 무슨 산을찾는 사람이라고 산찾사 ?

그래서 나선 이른아침.

열차를 타고 조치원에 내려 전의행 버스를 올라 조형 아파트에 도착을 함니다.

 

 

 

조형 아파트....

아주 오래전 군부대 였고 그 이후엔 김재원 국회의원의 농장였다가

한때는 새마을이란 이름의 임대주택이 이젠 조형 아파트로 그 이름과 모습을 바꿨습니다.

 

 

 

회다리...

인근 이고장 사람들이라면 모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곳은 이를테면 관광지라 말해도 될 만큼 유명한 곳 인데

내 나이의 연배라면 한번쯤  병마산 회다리로 소풍을 다녀간 기억이 있을 겁니다.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하며 맑고 깨끗하여 다양한 민물고기가 살았던 조천은

밤이면 햇불을 밝혀 고기를 잡고 장마가 지면 회다리를 넘느랴 튀어 오르던 물고기를

대바구에 장대를 달아 가만 앉아서 받기만 했던 유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함니다.

 

 

 

그러나...

그렇게 맑고 깨끗하던 조천은 흐리고 수량도 예전만 못함니다.

여름 한철을 미역감고 놀다 지치면

백사장을 하루종일 돌아 댕기며 꼴록이 알을 찾고

하천의 수풀을 뒤져 노고지리 알을 훔치며 놀던 유년의 기억에 잠시 젖어 봅니다.

예전의 회다리는 이것보다 훨~ 좁고 

수로를 건너 뛰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곳이라

국민학교 동창녀석 한수놈은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했던 곳이기도 함니다.

그녀석...

기억이나 할련지 ?

 

회다리를 건너자

예전 물을 끌여 들였던 수로는 이젠 번듯한 도로가 되었고

그 옆의 밭엔 건물이 들어 섰습니다.

그 밭을 우리집에선 비로 모퉁이 밭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조형 아파트 자리가 군부대 였을때 우리 부모님이 군인을 상대로

국수를 말아 장사한 돈으로 구입한 밭인데 망나니 삼촌을 장가 들이며 내 아버지가

손수 일궈서 만든 배나무와 복숭아 과수원을 함께 넘겨 살림을 내 보냈더니

농사짖기 싫다며 장사 밑천을 마련한다고 악덕 사채업자에게

고스란히 같다 받친 임야의 일부가 바로 저 땅...

아주 옛일이지만 그냥 농사나 짖고 살았다면 지금은 

몇십억 떼 부자가 됐을 막내 삼촌인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전 비로 모퉁이 밭을 애써 외면하며 숲에 듭니다.

병마산...

예전 장마가 지면 물이 불어나 회다리를 건널 수 없던 우리들은

이 병마산의 7부능선을 돌고 돌아 학교를 가야 했습니다.

그때와 많이 달라진 초입의 등로엔 병마산을 향한 시멘트 도로가 깔려 있고...

 

 

 

관광지로 개발한다며 세웠던

저 탑은 초목에 가려 숱한 세월의 흐름을 온몸으로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찾지 않는 등로인가 봅니다.

거미줄이 성가시고 잡풀이 길을 막아 섭니다.

오랫만에 찾아 온 고향땅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병마산의 토라짐이 풀어지자

걷기 좋은 숲속 오솔길을 잠시 등지며 나는 내려 서야 했습니다.

자주 찾지 않아 아버님이 두렵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불효자인 제가 더 한심해서 그랬습니다.

형제와 나란히 누워 계신 가운데 저기의 저 무덤이 제 아버님의 산소입니다.

 

작은키에 다무진 몸.

항상 인자하신 미소가 트레드 마크인 나의 아버지를

우리 마눌님은 친정 아버지 보다 더 좋아하고 따랐을 정도로 다정하신 분이 셨습니다.

비록 배우지 못해 많이 읽고 알지는 못해도 어느 누구 못지 않는 고매한 인품을 지니신 아버님.

그런 제 아버님은 겨우 15살에 12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셨다고 함니다.

 

 

할아버지가 없어서 ?

아닙니다.

3대 독자인 할아버지는 귀하게 크신 몸이라 생활력은 전무.

어릴적 부터 제가 성년이 되기까지 나의 조부는 하이얀 모시적삼에

긴 장죽 의 담뱃대만 물고 계신 한량으로 기억될 뿐이며 제 자신 밖엔 모르시던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학을 하셨기에 맨날 공자왈 맹자왈만 찾았죠.

어릴적에 저는 할아버지가 허구헌날 찾는 공자와 맹자를 수 도 없이 죽이고 증오 했습니다.

읽는것 아는것 배운 것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일상적인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학식을 갖춘 학자라도 존경받지 못함니다.

어릴적..

출타후 귀가해서는 제일 먼저 사랑방을 찾아

절을 해야 했던 예절은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지 존경은 절대 아녔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이미 고인이 됐어도 바로 몇걸음만 옮기면 되는 조부의 묘는 도무지 내키지 않아 포기를 함니다.

 知行一致의 삶...

제 아버지는 비록 무식해도 인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여 조아리고 수구릴 만큼 행동하는 양심이며 또한 천하의 둘도 없는 효자 였습니다.

 

아버님 산소를 뒤로 하고 올라선 병마산.

어릴적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병마산의 전설을 담은 안내판을 정상에서 만났습니다.

정상엔 가던 길손 쉬어가라 반듯한 정자도 있습니다.

 

 

 

 

 

병마산 정상에서 내려본 풍광입니다.

참 낯설기만 한 모습...

세종시가 들어 서면서 달라진 아파트 군락이 먼저 눈에 들어 옵니다.

이 산만 내려서면 내 고향 마을이 지척이나 나는 실향민과 똑같습니다.

그마을엔 이미 모든이가 고향을 등졌고 외지인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병마산을 넘어 섭니다.

순간 모든 상념들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고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삶의 멍예를 짊어져야 했던 내 부친의

고통과 회한이 그대로 전해지는 이길을 오늘 나는 걸어 보려 함니다.

아직 해가 뜨기전 이른 새벽에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길을 나섰다고 함니다.

나의 아버지는 주인없는 산을 찾아 나무를 하다 보면 발걸음이 동림산을 넘어 

때로는 운주산까지 가야 했답니다.

그렇게 나뭇단을 만들어 조치원 장에 내다 팔아야만

보릿고개를 넘기며 연명을 할 수 있었기에.

 

병마산을 넘긴 순간....

바쁜 내 발걸음을 잡아 챈 밤톨들이 길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잠시 모든걸 잊을 수 있었습니다.

밤톨이 제법 실함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 보니

이런~!!!

초반부터 베낭이 제법 묵직해저 옵니다.

 

 

 

권리는 하나도 물려받지 못하고

의무만 떠않은 장남의 모진 삶은 그렇게 세 여동생을 시집 보내고

세 남동생 장가를 보내야 하는 희생을 치뤘어도 정작 동생들은 그런 고마움을

모르고 풍족지 못한 탓을 형에게 원망했으니 그 한이 오죽 했을까 ?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어릴적 부터 아버님은 우리 형제를 앉혀놓고 말씀 하시길

나중에 돈을 벌면 네 형을 줘라~

힘을 보태 형이 부자가 되면 그 다음 동생들은 수월해 진다.

ㅋㅋㅋ

아버님은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비록 은행을 털었지만(?) 집을 산 두동생들에 비해 남집 살이나 하는 형이 안쓰러워 그랬는지

전답을 몽땅 팔아 아파트를 사주고 형수에겐 번듯한 가게까지 차려 주셨습니다.

부친은 본인이 누리지 못한 장남의 한을 평소 그렇게 풀었습니다.

귀하게 큰 자식은 그러나 남은 물론 친동생조차 헤아릴 줄 모른다는 걸

조부님의 삶에서 아버님은 왜 보지 못하셨는지 ?

 

 

 

아버님이 원통하게 돌아가신 얼마후...

우리 마을엔 지각변동이 일어 났습니다.

수도를 옮긴다는 공약...

천정부지로 치솟은 주위의 땅값은 하룻밤 사이에 금싸리기 땅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 남들 얘기고 우린 시골집과 옹색한 텃밭 뿐....

그런데...

아버님은 상상도 못 하셨겠죠 ?

일찍 홀로되어 딸 하나 데리고 모진 삶을 살아야 했던 누님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던 귀하디 귀하게 키우셨던 당신의 장남이

그때서야 누님이 사시는곳을 수소문해 한일이 유산분활 포기각서에 인감도장을 받는일 였습니다.

세상 참 더럽습니다.

저는 삼성의 건희처럼 돈 많은 놈들이나 그런짓을 하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군요....

어짜피 죽으면 저렇게 썩어 없어진 뒤 

남는건 저기 저  길바닥 동물의 뼈조각 같은게 인생인데...

 

 

 

뚜렷하던 등로가 순간

사람 다닌 흔적이 전혀 없는 잡목에 가립니다.

그래도...

스틱으로 가린 수풀을 헤치면 등로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보이지만 않을 뿐...

우리네 사는 인생도 때론 이런 막막한 길을 만났때도 있겠지요.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암담한 내 가족의 현실이 바로 그랬으니까여.

 

하여...

내 자식만큼은 올바로 키워 보고자 무섭게 훈육했고

정말 천하게 키우고자 노력 했습니다.

저의 이런 교육방침에 반기를 든 아내와의 다툼이

화목한 내 가정에서 볼 수 있던 유일한 부부 싸움이기도 했구요.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냐 마는....

그래서 생긴 상처로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마음과 달리 서먹 서먹한 부자지간 이라도

 얘들이 진정으로 하는 이 한마디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존경함니다"

 

 

 

 

수렁같던 그 수림속을 헤집고 나오자

병마산이 어느틈에 저 만큼 물러나 있습니다.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이어지는 등로는 뚜렷함니다.

팔뚝의 생채기와 온통 땀으로 젖어든 몸뚱아리만 믿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KTX 열차가 지날때 내는

굉음이 바로 발아래 가까이 들려 옵니다.

이곳을 오면서 지도 한장 제대로 준비한게 없습니다.

내고장 인근이며 손바닥 보듯 뻔한 지리인데란 자만심에 그랬습니다.

 

KTX 터널을 지난 얼마후....

온통 잡목에 가려 시야를 분간 못할 무명봉의

갈림길에서 감에 의지해 잡은 등로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능선을 잇지 못하고  도중에

내려선 곳이 윗 부엉골에서 이어진 도로 한복판....

다시 찾아 올라선 능선에서 첫 알바의 황당함에 침착성은 실종되고

급한 마음에 방향을 잘 못 잡아 이번엔 반대로 진행을 함니다.

물론 세종시 둘레길 잇기란 산행중 처음 만나게 된 시그널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간 잘못도 있습니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깊은 산중엔

멧돼지의 흔적들이 금방 지나간 흔적으로 어지럽습니다.

산행중 만나지 말아야 할 짐승 기피 1호...

은근슬쩍 두렵기도 함니다.

 

 

 

그러다 만날 개활지...

들어난 주위 풍광을 보자 금방 길을 잘 못 들었슴을 그제서야 인식함니다.

 

젠장~!!!

 

 

 

다시 되돌아와 가고자 했던 능선을 이어 걷습니다.

이후부터....

능선길이 참 좋습니다.

주위의 잡목만 아니면 내가 알던 동네 구석 구석을 다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텐데...

 

 

 

걷다가 만난 중요 갈림길....

동림산을 향하려면 진행방향 좌측으로 꺽어야 함니다.

그러다...

뚜렷한 좌측의 능선을 외면해야 하는데

희미한 오른쪽 능선을 이어 걸으려 몇 발자욱 옮기자 마자

역시 잡목과 거미줄이 옷깃을 사정없이 잡아 땡깁니다.

준비해간 도로 지도와 지형을 살펴보니

어짜피 민태절에서 올라오는 도로를 건너야 동림산을 갈 수 있어 그냥 좋은길을 택해 내려 섭니다.

 

 

 

저건 무슨 건물 ?

내려선 후 바라본 명패가 폐기물 소각장으로 기억...

 

 

 

그 건물로 내려서기 전...

나도 모르던 내고장의 토기 가마터 유적지가 있습니다.

그 유적지를 내려서서 도로를 잠시 걸어 오르면 능선과 능선을 가로 질러 넘는

고갯마루에 동림산을 향한 이정목이 반갑게 맞아 줍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두차레의 알바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체력도 소진 됐습니다.

배는 고파오는데 동림산 정상까지는 참고 올라 가야 될 것 같습니다.

이른 새벽에 나선 내 아버지의 삶에 드리워진 멍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15살 그 어린 나이에 어찌 이런 혹독한 삶을 견디셨는지 ?

그때의 모든 청년들은 그런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 이시대와 비교를 하면 상상이 안되는 현실입니다. 

 

 

 

  (동림산~망경산~운주산 지도)

 

 

 

새롭게 시작된 동림산을 향한 오름질....

운주산을 넘어 고산사까지 대략 11.4키로.

알바포함 지금껏 걸어온 거리도 그 이상이라 해도 이곳에서

나뭇단을 지고 집으로 되돌아 걸어야 했던 아버님의 고행길 보다야 못한 길이니

애써 그 힘듬을 견디며 가파른 오름질을 시작함니다.

 

 

 

가파름의 연속인 오름질에 온몸은 열탕에 든 것 같습니다.

몇번을 쥐어 짜도 금새 차올라 어느새 머리띠를 넘어선 땀방울이 안경알을 적십니다.

그러나...

비록 힘들어도 친절한 이정표의 안내로 

불안함이 사라지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등로입니다.

 

 

 

 

구절터로 향하는 갈림길....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그곳엘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애절벽 아래 작은 암자.

아무도 없던 그 절터의 석간수가 참 달고 시원했던 기억에

오늘 산행에 모자랄 듯 한 식수를 보충하러 가 볼까란 생각은

이내 귀차니즘의 발동으로 포기를 함니다.

솔직히 이젠 터만 남았을거란 짐작에 석간수가 있을거란 확신도 없습니다.

 

 

 

힘든 오름길의 정점을 앞두고 눈에 띈 커다란 빗돌..

설마 저게 정상석 ?

 

 

 

심중리 편입 기념비 입니다.

연기군에 심중리가 편입된게 그리 좋은건지 ?

 

 

 

 

드디어 올라선 동림산 정상....

정상의 빗돌은 세운지 얼마 안된 작은 대리석인데

동림산 정상빗돌이 서야 할 그 자리엔 커다란 무덤이 차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게 바로 주객전도 ?

 

 

 

 

 

너무 허기가 졌나 봅니다.

물만 자꾸 들이키게 되니 더 입맛은 없고...

밥을 물에 말아 의무적으로 위장에 밀어 넣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한데....

 

 

 

동림산을 내려서는 길...

가파른 계단길이 끝없이 고도를 낮춥니다.

 

 

 

얼마나 또 고도를 높이려고 ?

그래도...

참 편안한 숲길입니다.

등로는 수북하게 쌓인 낙엽 속 부드러운 흙길이라

힘만 닿은다면 마구 내달려도 좋겠습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연속됩니다.

그러다 지루하다 생각될 쯤이면 이젠 디졌구나 싶을만큼 가파른 오름질이...

 

 

 

 

길위엔 도토리가 지천이고

밤톨이 널려 있어도 차마 줏어 들 힘이 없습니다.

이미 베낭엔 우리 두식구가 몇일을 까 먹어도 될 만큼의 밤이 들어 있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평일 산행이라 그런가 ?

아직껏 한사람도 만날 수 없던 등로...

 

 

 

가끔씩 만나게 되는 전신주만 맞아 주는데...

어릴적엔 저것이 공포의 대상.

 

 

 

타는 갈증...

수통에 물도 다 떨어저 갑니다.

망경산에 도착해서 들이켜야지 참아가며 걷던 길에서 만난 이놈....

길을 비켜 줄 생각이 없습니다.

스틱으로 슬쩍 건딜자 고개를 치켜뜨고 나를 노려 봅니다.

징그러워도 할 수 없이 스틱의 힘을 빌어 밀처 내자 비로소 날 살려라 도망 가는 놈...

순간...

산찾사 많이 쫄았습니다.

저놈이 끝까지 저항하고 안 비켜 줄까봐서...

 

 

 

망경산 정상....

 

 

드디어 도착한 망경산 정상...

물이 떨어진 대신 깍아온 배가 목마름에 큰 도움을 줍니다.

오늘 만큼은 정말로 간절해 지던 캔맥주....

왜 오늘 같은날 맥주를 얼려올 생각을 못 했을까 ?

 

 

 

 

 

망경산을 내려서면

전동에서 천안으로 가는 고갯마루 고소재에 이릅니다.

 

 

 

고소재엔 국가 유공자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등로는 유공자 묘역의 날등을 타고 올라 숲으로 이어지고...

 

 

 

숲속의 오솔길은

외길을 길게 길게 늘여놓고 운주산으로 인도함니다.

 

 

 

 

 

운주산이 가까워 질 쯤...

한차레 시멘트 임도와 나란히 타고 오르던 등로가...

 

 

 

정상을 향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자...

 

 

 

정상까지 계단길이 마지막 인내심을 요구함니다.

 

 

 

 

드디어 올라 섰습니다.

때론....

산임자에게 쫓겨나며 이곳까지 나무를 하러 왔다던

평생을 고단하게 살다 가셨던 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까지 걸었습니다.

그분이 평생을 원하고 바라셨던 자식들의 삶이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비틀리고 틀어진 삶이라 죄송하여 한편 원통하지만

知行一致를 몸소 실천 하셨던 내 아버지를 닮고자

이 못난 불효자는 운주산 정상에서 당신의 삶을 생각하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지표로 삼으려 하니 너그러이 용서를 구함니다

 

 

 

 

 

 

 

 

 

운주산을 내립니다.

하루종일 홀로 걸으며 사색했던 오늘의 발걸음이

내 생애에 또 어떤 변화를 가저다 줄지....

 

 

 

고산사를 향한 길에 만난 약수터.

원없이 들이 킵니다.

이렇게 시원하게 해소되면 얼마나 좋을까 ?

마음에 웅크린 원한과 증오도 이젠 그만 놓아야 할 텐데...

 

 

 

 

 

 

고산사를 스처 지나

한참을 걸어 내려 전원주택지를 지난 후...

 

 

 

1번국도 아래 지하도를 빠저 나와

구1번 국도변 미곡리 버스 정류장에 이르자

조치원행 시내버스가 때 맞춰 도착하고 있습니다.

 

 

 

눈에 익은 마을들이 버스의 차장을 스처 지납니다.

모습들이 많이 변했다 해도 역시 눈에 익은 내고향 산천의 풍광 입니다.

전동을 벗어나 모시울을 지나자 내가 태어나고 자란 병마산 자락의 자그만 산골마을

이름 마저도 촌스런 수작골에 내 눈길이 고정됩니다.

 

안녕~!

내 고향...

 

 

 

 

산에서 건강을......산찾사.이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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