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날-
깊은잠에 든 이른 아침 모닝콜에 잠을 깬다.
먼저 샤워를 하고 모든짐을 정리하여 베낭을 꾸려놓고 16층 식당으로 향한다.
이것저것 먹을것을 담아 자리에 앉아 산우들과 아침식사를 하는데 계란 삶은걸 입에 넣으니
완전 소금덩어리다.
그외 이것 저것 보기 좋아 담아온 음식이 하나같이 모두 짜다.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는건 만두 찐빵과 팥죽뿐...
나중에 우리곁에 온 가이드말이 이곳의 주식이 빵이라 우리가 가져온 반찬종류는
빵에 발라 먹는것으로 짜게 만든단다.
식사후 커피를 마시며 위해시 소피아 호텔 최고층에서 내려다 본 시내 풍광은
참 아름답고 청결하단 느낌이 든다.
(소피아 호텔 조식)
(호텔 레스토랑에서 내려다 본 위해 시내 풍광)
지난 한밤중 별들이 초롱초롱 했던걸 기억하는데
어느틈에 눈이 내렸나 아침식사후 철차산 등정을 위해 나온 시내 거리는 온통 빙판이다.
중국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유지된다란 말이 있다.
우리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교통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역주행은 물론 사람 자전거 버스 자가용등이 뒤섞인 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완전 아수라장 이다.
중국인들은 그네들만의 독특한 본능적인 질서가 있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기다리다
공간이 비면 들어갈 줄 알며 뒤 따르는 사람은 양보할 줄 한다.
그러기에 교통사고 통계를 보면 사고로 사망하는 자가 우리나라가 훨씬 더 많다니
참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곳 위해시는 부자들이 사는 도시라 그런지 건물과 사람들이
세련됨을 알수가 있는데 작년 황산을 가기위해 13시간 버스로 이동하며 본
다른 도심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남을 금방 알수가 있다.
그때 황산을 가며 바라본 도시는 회색빛의 우울함이 깃든 마치 유령의 도심을 보는듯 했고
거리는 짐승과 사람 자전거가 함께 뒤섞여 아수라장을 연상케 했었다.
사람들 또한 몇년 씻지도 못한 듯 한 얼굴에 부시시한 머리와 남루한 옷차림 일색였는데
이곳 거리의 사람들은 우리 조국 한국 서울 도회지의 세련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볼수가 있다.
위해시내는 온통 빙판길인데도
그곳을 운행하는 차량들은 체인하나 감지 않고도 번잡한 거리를 운행하고 있다.
차량들 틈새를 오토바이 자전거가 미끄러지지 않고 요리조리 잘도 빠저 나거는걸 보노라면
마치 묘기 대행진을 보는 느낌으로 운전기술이 최고로 좋은 나라는 중국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중국의 거리엔 자전거가 아주 많은데
특이한것은 자전거마다 등록번호가 있으며 우리나라 자동차세 처럼 일년에 얼마씩
자전거 등록세를 내야 한단다.
(눈으로 빙판길이 된 위해시의 거리)
빙판길이 된 도로로 인해 예정된 시간보다 더 걸려
철차산 청량정을 향한 들머리에 버스가 도착하여 내려보니
뭐 이런곳을 다 데려왔나란 느낌이 우선 든다.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서 바라본 청량정을 향한 들머리엔 눈에 거슬리는 채석장이 있다.
몇년전까지 돌을 캐내다 이곳 산을 찾는 한인이 늘고부터 상품적인 가치를 뒤늦게 인식한 중국정부가
전면 채석을 금지 했다 하니 자연적인 문화유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일깨워준다.
철차산은 영성시 남부 해안가의 산이며 539.8 m 의 청량정이 주봉이다.
다엽정,봉황정,향로정,대도정,홍화정,용정정,낭호정,탁자정등 9개의 봉들이 해무가 끼면
망망대해의 뗏목이 떠있는 형상임으로 구정철차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철차산은 도교의 발상지로써
1991년 산동성 정부의 허가로 성급 관광 명승지로 지정됨과 동시에
영성시 인민정부에서 철차산 풍경관리처가 신설되어 등산과 관광이 시작됨에
1992년 국가 임업부에서 국가급 삼림공원으로 명명 되었다.
(철차산 들머리 풍광으로 우측 채석장을 지나야 본격적인 등로가..)
철차산의 등로는 진행방향 우측으로
채석장을 낀 계곡을 거슬러 올라 안부의 사거리에서 우측 암릉을 향해 오른다.
이곳 부터 터지는 조망은 붉은색 지붕이 일색인 마을풍광과 더불어 시원한 바다가 보인다.
조선족 산행가이드의 말로는 오징어 덕장이 산 아래 있어 꼬리꼬리한 냄새가 난다는데
바람이 그곳으로 불어 그런지 전혀 그런 냄새를 맡을수 없다.
철차산 청량정을 향한 길에서 조금 내려선 암릉의 아래엔
조그만 절 하나가 있어 들려보니 그곳의 관리인인지 주지인지 사람하나가 나와
입장료로 돈 천원을 요구한다.
차산 천불사란 이름의 그 절을 들어가 보니
동굴을 파고 석굴에 부처님상을 빼곡히 돌을 쪼아 만들었다.
차산 천불사란 이름으로 미뤄 짐작하건데 아마 그 부처상이 천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차산 천불사의 전경)
(차산 천불사의 석굴모습)
차산 천불사를 뒤돌아 나와 청량정으로 향한다.
청량정으로 향한 암릉은 잔설이 얼어붙어 미끄럽다.
마지막 정상을 향한 암릉을 타넘고 올라서자 일망무제로 펼쳐진 풍광이 장관이다.
이곳 정상에서 적산까지 암릉의 능선줄기가 이어진다니 석도항에 내려 바로 적산을 올라
이곳 청량정까지의 종주능선은 2박3일이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정상에 올랐으니 하산이다.
날만 좋다면 릿찌코스로 원점휘귀 산행이 가능하지만
오늘은 왔던길로 뒤돌아 가야 된다는 조선족 가이드말에 서운함이 왈칵 밀려든다.
혼자라도 좀 그곳으로 하산하면 안되겠냐 물어보니
그냥 왔던길로 내리란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대전팀과 함께 하산하다 안부 사거리에서 아주 가까워 보이는
암릉을 가보려 나홀로 진행해 보지만 빽빽히 들어찬 소나무의 잔가지가 길을 막아 포기하고 뒤돌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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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바라본 풍광)
(철차산 정상에서 아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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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철차산 정상을 내린후
들판에 둘러앉아 김밥과 맥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끝날때까지
오늘도 인천산악회팀의 하산이 늦어지고 있다.
Am 트레킹 이희선님은 적산 법화원 관광과 출국수속의 시간 때문에
조선족 가이드에게 핸폰으로 어디쯤 오냐 통화를 하며 초조함을 보인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30여분이 더 지난 뒤 모두들 하산이 완료됐다.
인천팀이 식사를 하는 동안 조선족 가이드가
버스의 짐칸에서 한보따리의 의류를 꺼내어 혹 필요한 등산 의류가 있슴 사라 펼처놓는다.
이 세상에서 진짜는 어머니밖에 없다는 중국은 짝퉁의 본거지다.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전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짝퉁으로 만든 외국의 고급 승용차가 중요 부품외 모든것이 순정품과 호환이 된다니
그네들의 기술이 놀랍다.
신기술이 그 정도니 의류는 당연 명품과 짝퉁의 구분은 전문가도 판별 불가다.
국내서 2-30만원대의 노스 페이스 윈드 스트퍼 자켓이 2만원만 달랜다.
그중 우모자켓을 골라 가격을 물어보니 8만원이란다.
국내선 40만원대의 가격이니 헐값이 분명하나
이곳에선 너무 남겨먹는것 같아 깍아달라니 그건 1원 한푼 깍아줄수 없다하여
좀 괘씸한 생각이 드나 평소 갖고싶던 의류라 그냥 노스페이스의 라벨을 뜯어내어
걸처입곤 아내에게 돈을 주라곤 도망이다....
(하산 완료후 기다리는 버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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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행이 철차산 등반후 곧바로 적산 법화원 장보고 유적지로 향했다.
일본 헤이안 시대 천태종 승려 엔닌 스님이 입당구법한 내용을 일기체로 쓴
입당구법 순례행기로 비로소 알려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적산 법화원에 관한 이야기는
하버드 대학 아리샤워 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늦어진 산행시간을 단축하려
이 희선님이 입장료를 더 지불하고 적산 명신의 동상 앞 주차장까지 차로 올랐다.
산동성 석도항이 시원히 내려다 뵈는 곳에 자리한 장보고 상은 명신으로서 바다의 풍랑을
잠재워 주는 신으로 이곳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단다.
무게만 300톤의 적산 명신상은 바라만 봐도 웅장하여 모든이를 압도한다.
명신상 아래엔 옥으로 세긴 장보고 활동부도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촬영금지다.
그곳을 둘러본후 걸어내려 오며 높이 8m 무게 6톤의 장보고 상이 자리한 박물관에 들린후
법화원에 들어선다.
지금은 조그만 사찰이나 장보고 시절엔 500여명이 기도 하던 대 사찰였단다.
장보고..
그는 신라시대의 극심한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당나라로 밀입국하여
장교로 입신한후엔 동북아 물류의 물꼬를 뜬 대 선단을 이끌고 해상왕으로 이름 떨친인물이다.
820여년전 신라인을 위해 세운 절
적산 법화원에서 장보고의 업적과 기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귀국 수속을 위해 석도항으로 향한다.
(적산 법화원 유적지 풍광들...)
석도항에 도착하자 조선족 가이드가
우리에게 미리 주문받은 농산물을 나눠주며 돈을 받아 챙긴다.
검정께,참께,서리태,녹두,등 농산물은 우리네 시세로 봐선 완전 헐값이다.
올때는 빈손였는데 갈때는 모두들 농산물을 구입한 탓에 등엔 베낭 양손에 농산물 보따리를 들었다.
이틀을 함께 보낸 조선족 가이드와 작별후
승선하여 처음 우리가 들었던 선실에 들어오니 떠난지 얼마나 됐다구
벌써 고향이 그립다.
마음이 고향을 향하는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설 명절을 한달여 앞둔 시기라 그런지 짐을 산적하느랴 늦어진 출항은
예정시각에서 3시간을 늦게 고동을 울리며 서서히 어둠이 깔리 석도항을 벗어난다.
(저녁 노을에 잠긴 석도항)
무사 산행과 여행을 자축하는 선상파티로
대전팀이 한방에 모여 밤 늦도록 술과 안주를 비워내다 안주와 술이 바닥날쯤
얼큰한 라면이 생각난다 하여 자판기의 컵라면과 맥주를 빼먹기 위해 매점앞에 나가 지갑을 여니
잔돈이 없어 아랫층에서 밤세도록 마작과 노름을 즐기는 따이궁들에게 잔돈을 바꾸러 내려간 비윗장 좋은
친구 범승을 윗층에서 내려다 보며 사진을 한방 찍자 따이궁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얼른 카메라와 몸을 숨긴다.
중국과 한국을 왕래하며 물건을 운송해주는 자들을 따이궁이라 하는데
거의가 다 거칠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네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중국인이나 조선족은 한국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해
한국사람을 한국 놈이라 부른다는걸 알아야 한다.
이런 원성은 중국을 먼저 다녀간 선배들의 훌륭한 업적(?) 때문인데
하나같이 여자들을 유린하고 사기를 친 사례가 너무 많고 한국에 돈벌러 다녀온 조선족들로 부터
학대와 멸시에 온갖 수모를 다 당했던 일을 전해 들은 탓이란다.
특히 조선족은 한국민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심한것은
1996년 6월달에 발생한 원양어선 페스카마호 15호 선상반란 사건 이후다.
중국 조선족 6명이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돈 15만원, 한화로 2500만원의 빛을 내서
북경을 거쳐 서울에 도착후 바로 사이판을 거쳐 파나안 섬으로 가서 한국해양 수산 소속
원양어선인 페스카마호 15호에 승선 근로자로 일하게된 첫날부터
생전 배를 타 본적 없는 조선족들이 배멀미로 구토를 하자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된다.
그래도 조선족은 최선을 다해 맞아가며 작업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폭언과 구타가 이어저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못 쓸 정도에 이르자 그냥 집에만 보내달라
하소연을 하는데 귀국시켜 줄테니 신청서에 지문을 찍어라 속인후
신청서 뒷장에 지금껏 숙식과 비용을 송금하기전까지 사모아 구류소에 구금시킨다는 내용으로 인해
출국을 위한 손해배상과 수속비용이 늘어 1인당 빛이 삼천만원으로 늘어나는데 그 비용은 그들이
100년을 갚아도 못갚을 어마어마한 돈이다.
말 그대로 절망속에 빠진 그네들은 어차피 죽을 바에야 그들을 이지경으로 몰아 넣은 선장을
죽이고 말자 결심후 선장과 갑판장을 비롯한 11명을 살해 바다에 던저 버린다.
6명의 조선족은 일본 해협에서 체포되어 12월말 한국에 이송되어 한국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조선족 사회에 일파만파로 번저 구명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고
항소심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구명운동을 벌이나 그네들은 끝내 사형을 선고 받는데
한국의 수구언론들은 그런 전후사정은 뚝 자르고
야만적인 그네들의 살인행각만 집중보도하여 조선족에게 또 커다란 상처를 안긴다.
중국과 월드컵 예선 축구가 열리던 어느날
중국을 여행한 어느님이 그렇게 친절하고 상냥하던 조선족 가이드가
한국에게 중국이 경기에 지자 난리 부르스를 치며 한국축구 대표팀에게 욕을 해대더라며
그새끼들 무늬만 한민족이지 중국놈들여 하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게 자업자득이다.
더이상 조국과 등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이 시점에서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게 아니가란 생각을 해본다.
(밤세도록 노름을 즐기는 따이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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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선상파티에
초록잎새 슬며시 나가고 뒤이어 친구 아내가 따라 나가며
시들해진 분위기는 파장으로 이어짐에 오늘은 원래 배정된 나의 선실인 2인1실 특실에
지친 몸을 뉘여 마지막 선상의 밤을 보낸다.
중국을 떠날때완 다르게
파도는 잔잔하여 배의 요동을 전혀 느낄수 없다.
늦게 잠든 탓에 아침식사를 알리는 안내방송에 눈을 뜬 우린
마지막 선식을 들며 입항을 기다린다.
아침식사를 끝낸후
갑판으로 나서자 해무를 뚫고
붉은빛의 아기햇쌀이 쏘옥 고개를 내밀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갑판의 풍광)
(선상 일출 장면)
예정된 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도착한 배에서 내려
여객선 터미널을 빠저 나오며 3박4일 여정의 중국 해외트레킹을 끝낸다.
한중수교가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찾고 있다.
거대한 나라 중국을 다는 알수 없으나
야릇한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아주 적은 비용으로
중국의 문화와 생활상을 얼핏 체험하고
내가 좋아하는 산들과 멋진 풍광을 접할수 있는 중국은
앞으로 두고두고 내가 찾아 가야할 매력적인 여행지임이 틀림없다.
3박4일 여정 동안
그림자 처럼 우리의 뒤를 돌봐주고 챙겨준
AM 트레킹 이희선님께 이글을 통해 감사를 드린다.
(인천항 제1 여객선 터미널에서 이 희선님과 헤어지며...)
산에서 건강을...산찾사
출처 : 산장나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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